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평양성 전투(668년) (문단 편집) === 평양공성전 === 이세적이 이끌던 당군은 압록책(鴨淥柵)이라는 지점에서 총집결을 한 후 대행성, 욕이성을 무너뜨리며 쳐내려와 [[평양성]]에 도달했고 9월 21일, 신라군 또한 당군과 합류해 평양성을 포위한다. [[보장왕]]은 이를 보고 [[연남산]]과 수령 98명을 보내 [[이세적]]에게 항복을 하려 했으나, [[연남건]]이 결사 반대를 하여 무산이 된다. 그리고 고구려군은 [[나당연합군]]과의 최후의 일전에 돌입하게 된다. 장장 1달간의 평양성 전투는 처절한 전투였다. 평양 외곽에 위치한 신라 군영에 투입된 고구려군은 서당[* 평시에는 수도 [[서라벌]]에 주둔하는 신라의 중앙군.] 당주 김둔산(金遁山)과 [[한산주]] 소감 김상경(金相京)이 죽음을 불사하고 저항해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간다. 신라군 중 부양(斧壤, 지금의 [[강원도]] [[평강군]]) 사람 구기(仇杞)는 평양 남쪽 다리(南橋)에서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고 비열홀(卑列忽, 지금의 [[함경남도]] [[안변군]]) 사람 세활(世活)은 평양소성(平壤小城)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한다. 평양성 외곽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게 되자 이어 평양성 공방전이 이어지게 된다. [[문무왕]] 본기의 기록에서는 평양성 북문에서 공을 세운 북거(北渠)라는 인물에게 관직과 상을 주는 것으로 보아 북문 공방전도 치열했던 것으로 보여지며, 평양성 대문에서의 싸움은 흑악현 현령(黑嶽令)[* 흑악현이 어느 지역인지는 비정이 안 된다고 한다.] 선극(宣極)의 공이 컸다고 한다. 평양성 내부에서도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져 [[한산주]] 소감 박경한(朴京漢)이 평양 군주 술탈(述脫)을 죽이기도 했는데 고구려군의 주요 지휘관이 평양성 내에서 칼에 맞아 죽을 정도였던 것. 이처럼 피를 말리는 공방전이 1달 넘게 이어가던 와중에 [[나당연합군]]에게 뜻하지 않는 기회가 찾아왔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